내가 지금 소속된 연구실은 복지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연구실에서 일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지만 같이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들 중에서 연구실에 커피머신이 구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커피뿐만 아니라 옥수수수염차, 둥글레차 등 카페인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도 함께 준비되어 있다.
겨울이라 뜨거운 음료를 즐길 땐 컵 홀더를 함께 사용하는데, 방장 형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카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컵 홀더가 아닌 얇고 저렴한 친환경 컵 홀더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컵 홀더는 한 번에 천 장씩 온다는 것이 새로운 제품을 시도한 가장 큰 이유였다.
사용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위 이미지처럼 양 끝을 당겨서 연결한 뒤 종이컵에 끼우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편하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사용 준비 과정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가장 먼저 나왔다. 양쪽을 당겨 입체 구조로 변형시키고 끝을 연결해 종이컵에 끼울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드는 과정이 너무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컵 홀더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원터치로 컵에 끼울 수 있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에 비하면 확실히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불편하긴 하다. 잘못 당기면 찢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어 사용할 때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종이를 당겨 발생하는 입체적인 구조 덕분에 종이컵과 손이 닿는 면적을 줄여 컵에서 손으로의 열전달을 줄이는 아이디어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손과 컵 홀더 입체 구조의 접촉 면적 역시 함께 줄어들게 되었고, 컵을 잡을 때 손이 아프다는 의견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간편하게 종이컵에 장착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컵 홀더를 사용했을 때 손이 아프다던가 하는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제품 설계에 들어갔다.
이번 경우, 이전 글(3D 프린팅 : 카메라 거치대 만들기)과 다르게 열이 중요한 설계 변수이다. 만들고자 하는 제품(컵 홀더)이 뜨거운 음료를 담은 종이컵과 맞닿는 상황에서 녹지 않아야 하고, 이를 잡았을 때 손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종이컵을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컵에 장착하는 과정이 편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가장 먼저 떠올린 재료는 역시 3D 프린팅에서 많이 쓰이는 PLA 재질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메이커 스페이스의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PLA 재질의 경우 녹는점이 130~180°C인데 커피나 차는 100°C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재료로 사용해도 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 재료를 사용한다면 제작은 3D 프린터가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형태를 잘 디자인하는 것뿐이다. 열전달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착각이었다) 안정성에 집중한 형태를 고안했다. 종이컵을 통째로 감쌀 수 있도록 더 큰 컵 형태의 컵 홀더를 디자인하기로 했다.
모델링에는 역시 오토캐드를 사용했다. 컵 모양이기 때문에 원기둥으로 만들기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원을 그린 후 이를 돌출시키는 과정에서 TAPER 명령어를 사용하면 원뿔대 형태를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REVOLVE 명령어를 사용해 회전체로 활용하는 편이 더 익숙하다. 따라서 컵의 위, 아래의 지름과 두 지름 사이의 거리를 구해 평행사변형을 그린 뒤 회전체로 컵 형상을 모델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다. 얼핏 보면 잘 들어간 듯 보이지만 이미지에 표시된 곳을 자세히 보면 틈이 벌어져 있다. 공차가 너무 커 종이컵이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안정적인 종이컵 지지'라는 제약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차를 수정한 뒤 2차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SOLIDEDIT 명령어를 사용해 종이컵이 맞닿는 부분의 표면을 늘리고 줄이는 과정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차 프로토타입은 종이컵이 너무 딱 맞아서 잘 빠지지 않았다. (바닥에 구멍을 만들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잘 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안정성'이라는 제약조건을 충족시키고 보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뜨거운 음료를 담았을 때 그 열기가 고스란히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제품 제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재료의 녹는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용 환경(80~95°C, 예상)에 비해 재료의 녹는점(130~180°C)이 많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재료의 열전달은 문제가 됐다. 2 mm 두께로 만들면 충분히 열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안일한 판단이었다. 가장 중요한 핵심 기능을 놓치고 디자인에 신경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단열을 위해서는 열전달 방식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도를 방지해야...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와 동시에 공기를 단열재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촉 방지와 공기층 형성을 둘 다 만족시킨 것이 카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존의 컵 홀더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컵 홀더를 만드는데 굳이 창의적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컵을 만든다면 또 모를까.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면 1회용으로 사용하는 컵 홀더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LA 재질은 생분해성 플라스틱으로, 환경 오염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다. 쉽게 말해 옥수수 전분.)
앞서 만들었던 2차 프로토타입을 변형시켜 종이컵과 맞닿는 부분에 요철 구조를 만들었다. 컵 홀더 내부 크기보다 살짝 큰 톱니 구조를 만든 뒤 SUBSTRACT 명령어를 사용해 제거하는 방식으로 요철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요철 구조의 각진 부분은 FILLET 명령어를 사용해 라운딩을 했다. 종이컵과 컵 홀더가 선 접촉을 이루면 접촉 면적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 접촉이 더 좋긴 하겠지만 적층형 3D 프린터를 사용한다는 조건을 고려해보면 제작 난이도 상승 및 품질 저하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위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컵 홀더이다. 사실상 형태는 카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 다르지 않지만 앞서 언급했듯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필라멘트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요철 구조를 적용해 접촉 면적을 줄인 덕분에 종이컵에 뜨거운 음료를 부었을 때 손이 같이 뜨거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형태가 완전히 깔끔하게 나온 것은 아니다. 아마도 3D 프린터 사용 시 설정상의 문제인 것 같다. 이전 제품들을 제작할 때와 비교했을 때 3D 프린터 설정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데 아무래도 이번 제품은 워낙 얇은 형태를 제작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이런 문제는 몇 차례 조건을 바꿔가며 확인해보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은 덤이다.) 하지만 제작한 컵 홀더는 사용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누군가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제품이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겠지만 단지 나의 만족, 조금 더 넓게 보면 연구실 구성원들의 만족을 위한 제품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노력은 불필요할 것 같다.
구매한 종이 재질의 컵 홀더가 바닥날 때쯤 몇 개 더 만들어서 가져다 두고 반응이 좋으면 더 만들 생각이다. 3D 프린터의 가장 큰 장점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도면만 있으면 추가적인 노력 없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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