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했던 것
대학원에 입학하고 개인이 사용할 컴퓨터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있던 모니터 하나를 더 들고 가서 듀얼 모니터를 사용하고 있다. 모니터를 설치할 당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책상 아래 오른쪽으로 몰아 놓은 컴퓨터 본체와 책상 위 왼쪽 모니터를 연결해야 하는데 선이 짧았던 것이다.
당시 해결 방안은 두 가지가 있었다. 더 긴 연결 케이블을 사거나 본체의 높이를 높이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고작 몇 cm 모자란 선 때문에 새로 케이블을 사기엔 돈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됐다. 주문한 그래픽 카드가 담겨 온 종이 상자가 적당한 높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기능적인 부분은 해결이 됐지만 미관상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언젠가 저 컴퓨터 받침대 새로 만든다..."
컴퓨터 테이블
예전에는 집에 데스크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컴퓨터가 위치해 있던 컴퓨터 테이블도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으로 집에 있는 데스크탑을 사용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모의고사 문제를 다운로드할 때였던 것 같다. 그 이후 재수하는 기간에는 사촌 형이 쓰던 넷북을 사용했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노트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요가 없어진 재화는 점점 그 가치를 잃고 결국 쓰레기로 변해간다. 데스크탑을 사용하지 않으니 집 안에 있던 컴퓨터 테이블도 본래의 가치를 잃고 점점 걸터앉는 곳, 짐짝을 올려놓는 곳 정도의 기능을 유지하다가 결국 스스로가 짐짝이 되어 베란다로 쫓겨났다. 그 위치에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갑자기 발생한 사건
엄마가 요즘 집 정리를 조금씩 하시더니 끝내 집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쫓겨간 것들의 종착역인 베란다마저 손을 대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하는 말씀이 저 컴퓨터 테이블을 버려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데 저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내가 저 테이블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주말이 하루 사라지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폐자원 재활용
저 컴퓨터 테이블을 그냥 버리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운 전공 내용들은 졸업과 함께 머릿속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래도 내가 공대 출신인데 저 좋은 목재를 그냥 버리는 것은 4년간 다닌 대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대 출신인 것은 별로 상관이 없...) 좋은 자원을 그냥 버리는 것은 환경을 위해서도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마침 내게는 연구실에서 컴퓨터 본체를 받치고 있는 종이 박스를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상황이다. 적당한 크기의 목재가 있고 그걸 가공할 수 있는 공구들이 있으며 그 공구들의 사용법이라는 지식과 직접 사용해본 경험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의지가 없었는데, 책꽂이 한편에 잠들어 있는 공학사 학위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통에 반 강제로 주말에 스케줄을 잡았다.
제품 기획 & 제작
기능 추가
내게 필요한 것은 종이 박스보다 튼튼한 컴퓨터 본체 받침대이다. 재료는 주어진 목재로 정해졌다. 현재 사용 중인 종이 박스는 내가 졸업하기 전에 뭔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컴퓨터용 테이블로 쓰이던 목재라면 안심할 수 있다.
목재라는 재료가 생각보다 믿음이 가는 상황이 되다 보니 추가적인 기능을 더 넣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장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거의 하루 종일 책상 밑에 굴러다니는 신발을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 기능을 위한 컴퓨터 본체 받침대 만들기 계획을 세웠다.
치수 측정
상황에 맞게 재료 선정이 완료됐기 때문에 치수 측정 단계로 넘어갔다. 높이는 원래 컴퓨터 받침대가 필요했던 이유에 맞게 짧은 연결 케이블이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연결할 수 있도록 충분히 높아야 하고, 길이는 컴퓨터 본체가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며, 너비는 신발 한 켤레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 발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쓰려고 만드는 것이고 어딘가에 체결되어야 하는 부품은 아니기 때문에 mm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할 필요는 없다.
목재 재단
치수를 모두 측정하고 나서 보니 기존 컴퓨터 테이블에 달려 있던 판 하나만 사용하면 될 것 같았다. 애초에 계획한 받침대 형태가 복잡하지 않고 직사각형 모양의 판자를 이어 붙여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판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도 샤프로 선을 그을 때 톱의 두께만큼 오차가 발생할 것을 고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곧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오랜만에 하는 톱질이다 보니 좀 힘들었다. 그래도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금세 요령을 찾고 작업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학교 동아리방에 있는 핸드 그라인더를 사용하면 1시간도 걸리지 않고 절단면 품질도 훨씬 좋았겠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동아리방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접 톱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절단면은 수평, 수직이 전혀 맞지 않았다. 제도 샤프로 표시한 선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난 그냥 장비 탓을 하련다. (반도체도 기본 2,000억부터 시작하는 노광 장비 없으면 못 만든다.)
조립
앞선 단계에서 재단이 아주 엉망으로 됐기 때문에 수직 수평이 잘 맞지 않을 것이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단면의 한쪽씩은 절단면이 수직에 가까워서 조립 과정에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조립 이후에는 구조적으로 지탱이 가능한 형태가 되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조립을 위해 못을 박을 자리는 핸드 드릴을 사용해 따로 살짝 표시를 했다. 그런데 못을 박으려고 생각해보니 합판 형태의 겹겹이 쌓인 부분에 못이 뚫고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제작 과정에서 합판이 갈라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못 대신 나사를 사용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우선 나사의 굵기보다 작은 구멍을 뚫었다. 나사를 사용해 바로 구멍을 뚫으면 역시 갈라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못 : 망치 사용, 나사 : 드릴 사용)
아래 이미지는 최종적으로 드릴로 나사못을 모두 박은 결과물이다. 윗판과 양쪽 측면 지지대 판을 연결하기 위해 양쪽에 3개씩 6개를, 양쪽 측면 지지대 판과 후면 지지대 판을 연결하기 위해 양쪽에 2개씩 4개를 사용해 총 10개가 필요했다. 아래의 왼쪽 이미지의 테이프는 나사못을 박기 전 조립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붙였다. 어떻게 한쪽씩 수평이 맞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종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태를 완성하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상판과 측면, 후면 판은 어떻게 연결했지만 애초에 재단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바닥과 닿는 부분이 수평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귀퉁이 한쪽이 바닥에 닿지 않았고 대각선 방향으로 흔들림이 있었다. 이런 흔들림이 있는 받침대 위에 컴퓨터 본체를 올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위 이미지와 같이 단차가 가장 심한 한쪽 귀퉁이에 나사못을 하나 더 박았다. 아마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몇몇 책상이나 의자들은 다리와 바닥이 맞닿는 부분에 나사가 들어 있어 이를 돌리는 것으로 모든 다리가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같은 원리를 사용해 흔들림 현상을 해소할 수 있었다.
총시간은 4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톱질에 들어간 시간이 가장 크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육체적 노동을 생각하니 핸드 그라인더를 하나 살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쓰게 될지 모르는 장비라 생각만 하기로 했다. 언젠가 경제적으로 좀 안정된 상황이 되면 하나씩 시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뒷정리
제작의 마무리는 역시 뒷정리이다. 톱질을 한 시간에 비례해 톱밥이 엄청 쌓였다. 혹시 목재에 대해 톱질을 할 일이 있으신 분들은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시길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처음에 그냥 시작했다가 호흡기를 뚫고 들어오는 미세 톱밥에 아주 혼이 났다. 이런 톱밥이 쌓여 있는 베란다를 그냥 둘 수 없어 청소기를 돌렸다. 아래는 청소 과정인데 찍고 보니 한 줄 한 줄 깨끗해지는 영상에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가치의 전환
완성된 다음날 제작한 컴퓨터 본체 받침대를 학교에 가져갔다. 컴퓨터 아래에 깔려 있던 종이 박스는 해방되었다. 어찌 보면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작업이기도 한데 다른 쓰레기가 생겼다. 종이 박스보다는 나무가 튼튼하니 사라진 가치보다 생겨난 가치가 더 클 것이다.
위 이미지는 만든 컴퓨터 받침대 위에 컴퓨터 본체를 올려둔 결과물이다. 제작 과정에서 목재 재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조립 후 단차도 커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설치가 완료되고 보니 제법 그럴싸한 모양이 나왔다.
원하던 대로 신발을 넣을 공간도 생겼다. 치수를 측정해서 만든 만큼 딱 맞게 들어간다. 제품 기획 단계에서 고려한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다. 중간 과정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과만 봤을 때는 제법 괜찮은 것 같다.
내가 아무 생각이 없었을 때 컴퓨터 테이블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쓰레기였다. 그런데 활용할 방법이 생각나고 보니 쓰레기가 자원이 되었다.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버릴 때가 되어서야 그 가치를 찾게 된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손재주나 경험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효율성 문제
글을 여기까지 쓰고 보니 투입량 대비 산출물의 비율이 궁금해졌다. 신발 수납 기능이 있는 컴퓨터 본체 받침대를 만들기 위해 내가 투입한 것들과 그 결과로 얻은 것들을 비교한다면 효율은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위 이미지는 흔히 볼 수 있는 PC 본체 받침이다. 본체의 크기에 맞게 조절이 가능하고 바퀴가 달려 있어 움직일 수도 있다. 가격은 고작 8,000원 수준이다. 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한편 내가 만든 컴퓨터 받침은 훨씬 비싸다고 볼 수 있다. 재료는 쓰레기를 재활용했다고 생각해서 0원이라고 보더라도 제작 과정에 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에 최저시급 8,590원 기준 34,360원이다. 8,000원이면 얻을 수 있었던 효과를 34,360원을 주고 얻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26,360원 손해를 본 셈이다.
물론 신발을 넣을 수 있는 기능을 고려하면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10,000원이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컴퓨터 받침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즐거움이 과연 26,350원 수준을 상회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돈으로 계산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직접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경험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충분히 그 가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아니지만 먼 훗날 언젠가 은퇴 후 좋은 손재주를 살려 목공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은퇴를 한다고 해서 타고난 손재주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경험은 아마 그때 가치가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짐짝 취급을 받던 컴퓨터 책상이 긴 시간이 흘러 나에게 새로운 가치로 다가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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