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 중인 연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물질을 혼합한 용액을 사용하는 과정이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연 용액이 균일하게 잘 섞이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용액을 사용할 때 의도와 다르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봤을 때는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고안하게 되었다. 용액을 가만히 두고 그 안에서 뭔가 뭉치거나 가라앉는 현상이 생기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을 것 같았다. 24시간 정도 아무런 충격 없이 가만히 둬야 하는데 실험실 안에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용 테이블은 누군가 계속 사용하고 연구실에는 실험용 샘플을 보관하는 것이 금지사항이다. 그렇다고 6시간 간격으로 24시간 관측해야 하는 샘플을 집에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에 연구실 한쪽 벽면에 이는 철문이 보였다.

 

 이 철문은 사용하지 않는 문이었고 문 바로 앞에 테이블을 놓아 막아버린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의도하지 않으면 우연히 문을 건드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럼 저 벽에 매달아 놓으면 아무도 건드릴 일이 없겠군'

 

 애초에 사용하려고 했던 15ml conical tube 역시 이름 그대로 바닥 부분이 뾰족한 형태여서 세워 두는 것이 어려웠는데 잘 됐다 싶었다. 그래서 바로 철문을 활용할 수 있는 거치대 만들기에 들어갔다. 자석을 활용해 철문에 붙일 생각이었다.

 

고려사항

 뭔가 만들때는 항상 그 물건을 사용할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실험에 사용할 경우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한번 더 고민하는 편이다. 이번 경우는 외부에 가해지는 힘이나 자체적인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내가 진행하려고 한 침강 실험은 말 그대로 용액을 가만히 둬서 뭔가 가라앉는 것이 있는지 보는 실험이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연구실 안에서 갑자기 크게 발열이 있을 이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열의 관점은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판단했다. 상온에서 고체 상태를 유지하는 그 어떤 재료라도 사용이 가능하다.

 

공차

 

 실험에 쓰일 conical tube가 잘 고정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공차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실험군과 대조군 두 개의 conical tube를 고정시켜야 하고, 대조군의 경우 6시간마다 흔들어 잘 섞인 상태를 유지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틀에서 뺄 때 너무 뻑뻑하면 안 된다는 점 정도가 고려사항이었다. 공차에는 문제가 없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강도

 

 사용하는 용액은 conical tube의 무게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실험군과 대조군 합쳐서 50g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변형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위의 모든 고려사항들을 확인한 결과 내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사용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PLA 재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3D 프린팅이 가능한 재료로 구성된 필라멘트가 있었다면 역시 후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작 과정

 용액을 만드는 데 2일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제작 기간은 충분했다. 앞선 고려사항들은 뭔가 만들 때 매번 거치는 과정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은 3D 모델링제작이다. 제작은 3D 프린터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내 시간이 소모되는 부분은 3D 모델링이다. 이번에는 복잡한 형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모델링부터 프린팅 시작까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3D 모델링

 

 이번에도 역시 내가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프로그램인 오토캐드를 사용해서 모델링을 시작했다. 철문을 보고 벽에 매달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던 것은 연구실에 굴러다니는 자석이 있기 때문이다. 테이프로 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탈착이 어려워 제외시켰다.

 

2015년산 자석

 

 위 이미지와 같은 자석이 있었고 몇 차례 시도해본 결과 자력에 의한 부착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저 자석을 홀더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자석도 내 소유가 아니니 재사용이 가능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석을 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뺄 때도 쉽게 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조금 신경을 썼다.

 

자석은 동그랗지만 이동 경로는 직선이다

 

 위 이미지에서 파랗게 표시된 원판형 자석의 이동 경로를 먼저 모델링한 뒤 완성한 틀에서 빼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존재하는 부품과 맞추는 과정이 필요할 때는 아직까지 이 방법이 가장 좋은 것 같다. SUBSTRACT 명령어 한 번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물론 자석이 드나드는 길을 잘 고려해야 한다.

 

 홀더 자체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본적인 형태는 직육면체 두 개를 붙인 상태에서 원기둥 두 개로 구멍을 뚫어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직육면체와 원기둥을 만든 뒤 UNIONSUBSTRACT 명령어를 사용하면 쉽게 아래 이미지와 같이 진행할 수 있다.

 

합치고 뺀다

 

  모델링이 마무리 되면 끝 부분을 라운딩 처리를 한다. FILLET 명령어에서 R을 선택하면 끝부분을 동그랗게 말아둘 수 있다. 라운딩 반지름을 잘 설정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을 수 있다. 라운딩을 하는 것은 사실 기능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안전에 매우 민감한 편이기 때문에 혹시나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남아 있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라운딩 처리를 하는 편이다. 처리를 완료하면 아래와 이미지와 같이 뭔가 완성된 형태처럼 느껴진다.

 

모델링 형태가 예쁘게 잘 나온다

 

 모델링한 결과물을 stl 파일로 저장한 뒤 이를 3D 프린터에 입력시켜 프린팅을 진행하였다. 3D 프린터의 장점은 역시 내가 만드는 과정 동안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하나 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래 이미지는 프린팅 된 결과물이다.

 

큰 문제 없이 완성

 

후처리

문제 발생

 

 만들고 보니 살짝 문제가 있었다. conical tube의 뚜껑 때문에 수직으로 잘 내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는 뒤집는 방법을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사진을 찍을 때 배경이 깨끗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사용하려다 보니 발생한 문제였다. 구조적인 문제이고, 사전 설계에서 생각을 좀 더 충분히 했더라면 방지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았다.

 

해결 방안

 

 뭔가를 만들 때 깎아내는 것과 더 붙이는 것 중 더 쉬운 방법은 깎아내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찰흙같은 재료를 사용한다면 붙이는 것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제품을 만들 때는 결국 재료를 원하는 형상으로 붙여야 하고,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그 난이도가 깎아내는 것에 비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사용한 3D 프린터만 봐도 재료를 붙이기 위해서는 필라멘트를 녹이기 위해 200°C 이상으로 가열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필요 없는 부분이 추가된 상태에서 편집을 잊은 채 제작이 진행되었다면 뽑은 형태를 깎을 수 있다.

 

 마침 나에게는 드레멜이라는 사용 가능한 옵션이 있었다. 이전에 사용해본 경험이 있었고 내 손재주로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고민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동아리방에서 사용한 드레멜

 

 이걸 가지고 뚜껑이 닿을 부분을 갈아내기 시작했다. 손으로 진행한 과정이기 때문에 두 개의 틀을 완전히 똑같이 맞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목적은 실험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는 수준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 정도 기준에 맞춰 진행했다.

 

 드레멜을 사용할 때는 가능하면 보안경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작업은 결국 드레멜을 통해 플라스틱을 갈아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플라스틱 조각이 튀어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업 중 조각이 튀어 눈에 들어간 상황이 있었다. PLA 자체가 생분해성 플라스틱이라 들어가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뾰족한 형태 때문인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실험 진행

 

 위 과정을 모두 거쳐 아래와 같은 완성품을 만들었다. 자석을 통해 철문에 잘 붙어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 깨끗하게 배경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험 준비 완료

 

 비록 실험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나타냈지만 실험을 진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간단한 부품이지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제법 괜찮은 달란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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